만약 어떤 배우가 완벽하게 무대 인물로 바뀌었을 때, 우리는 그 무대 인물에게서 배우를 분리해낼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그 무대 인물을 가리켜 가상의 존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가상의 존재라고 지적하는 사람은 무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일 뿐이다. 무대 위에서 그 배우는 사라진다.
백운산으로 이르는 오솔길로 한참 걷다가 후박나무 사이로 난 작은 길을 봤다. 지형과 지도로 짐작건대 능선으로 바로 치고 올라갈 수 있는 길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정상에 다다르고 싶었던 나는 그 작은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약초 캐러 다니는 길인 듯, 한 500m쯤 가서 그 길은 끊겼다. 길이 끊어진 그 곳은 가파르긴 해도 바로 능선 아래쪽이었다. 나는 능선을 향해 필사적으로 올라갔다. 한 한 시간을 걸었을까, 능선에 이르러 한숨을 내쉬곤 잠시 쉬었다가 다시 걸어가다 보니 후박나무 사이로 난 작은 길이 보였다. 나는 다시 그 자리에 온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산악인들이 흔히 링반델룽이라고 말하는 경험이었다. 다시 지도를 펼치고 한참을 들여다봤지만, 내가 걸어온 길을 지도 상에서 되짚어갈 수 없았다.
파스칼은 종교적인 신앙심을 수학 공식으로 남겼다. 한 사람이 선행을 쌓아서 천국으로 들어갈 확률은 아무리 작다 해도 유한한 값을 가진다. 반면에 종교가 보장하는 가치는 무한하다. 이 둘을 곱하면 무한한 기대값이 나온다. 그러기에 명민한 도박꾼이라면 누구라도 종교에 뛰어들지 않을 이유가 없다.
- <데드마스크>
탐침하듯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저처럼 광활한 운명의 땅에 드리우며 미래를 예측한다. 인간은 무엇보다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을 형성시킨다. 운명이 아무리 광대하고 폭력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간만은 그 운명과 맞서 자신의 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는 존재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맞선다고 할 때, 맞서는 그 대상을 일러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번이라도 전기를 써본 사람이라면 우리의 의지가 맞서는 그 대상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의지 자체가 운명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끊임없이 남빛의 바다를 하얀 물보라로 바꾸는 뱃길 주변에서는 아무리 해도 당장 대양의 권태로운 푸른빛이 보이지 않듯이 인간의 의지 역시 삶의 여러 굴곡 중 하나일지 모른다. 때로 파도가 치고 남빛 대양의 한켠이 하얀 물보라로 부서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사소한 부분일 뿐이다. 운명한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진짜 얼굴을 보여줄 뿐이다. 운명은 논리적으로 인간의 의지에 맞서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보여준다. 씨앗이며 고목을, 꽃이며 과실을, 새순이며 낙엽을, 탄생이며 죽음을. 그 속에 인간의 보잘것없는 의지까지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 <잃어버린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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