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말 오래 전에 쓴 영화 리뷰. 지금 다시 보니 가득한 허세가 마구 느껴진다. 그 당시에는 나름대로 잘 썼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성민이가 그대로 복사+붙여쓰기하여 어떤 교양 수업에 레포트 발표했다고 함. 선생님이 칭찬까지 하셨다고.
<천하장사 마돈나>는 간만에 보는 수작이다. 이해준,
1.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 바로 ‘동구’다.
2. 아버지, 가족
두 감독 중 하나가 인터뷰에서
‘아버지를 뒤집어서 날려버리고 싶다는 환타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솔직히 나는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그 환타지는 우리 세대 또한 여전히 안고있는 ‘아버지’로 대표되는 가부장에 대한 부담감과 거부감을 제대로 찌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동구와 아버지의 관계는 파격적이지만 현실적이고 여운이 남게 종결되었다. 한국 영화는 마초아버지의 ‘자식사랑’을 그동안 너무 미화해오지 않았는가. ‘아버지가 마초이고 폭력적이고 찌질하긴 하지만, 자식들을 무한히 사랑하며, 고로 가족은 사랑으로 아버지를 감싸안아야 한다’ 는 식의 휴머니즘은 이제 지겹다.
가족은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단위가 아니다. 가족에게도 ‘불가능’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가족에게 상정되는 ‘무한한 가능성’ 때문에 우리의 어머니가, 아버지가, 그리고 누나, 형이 살해되는 것은 아닐까. 서로 지원하고 이해해주어야
하는, 그렇게 하기로 선천적으로 규정되는 관계들.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는 형제끼리,
부모끼리 접점을 찾지 못하고 뱅뱅 도는 경우가 정말 많은데도, 이런 이야기는 스크린에서 금기시된다. 그것은 한국영화가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부장성, 마초성에도 기인한 바가 크겠지만,
가족의 한계를 효과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 장치가 그동안
부재했다는 것도 원인이다. 인간을 규정짓는 모든 단어가 무기력하듯이 가족 또한 그렇다. 나와 아버지, 어머니의 관계를 생각해보라. 거대한 동그라미 속에서
일부는 부정하고, 일부는 무시하고, 일부는 못본 척하고, 일부는 사랑하고, 일부는 이해한다. 이 미묘복잡한 관계를 언어로 풀어내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재미있게 보았던 <가족의 탄생>은 이 일을 ‘가족’의 범위를 넓힘으로써 해결했다. ‘가족’이 가지는 무한한 가능성을 위해 현재까지의 개념을 재조정한 것이다.
반대로 <천하장사 마돈나>는 동구의 가족을 그대로 직시하면서 문제를 풀어나간다. 동구를 살게 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동구를 이해할 수 없다. 아버지가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름’이다. 아버지가 전체적으로 무능하고 폭력적이고 문제적인 인간이지만, ‘성전환’이라는 성정치적 문제에 대한 견해는 스스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원래 그런 인간이니까’는 그 인간에 대한 무시라기 보다는 인정이다. 그것이 비록 왜곡된 남성성에 의해 변형된 것이라 할지라도. 영화가 이 ‘다름’에 대해서 내놓을 수 있는 대안은 갈라서는 것 밖에 없다. 서로 영원히 평행선일 테니까.
사랑은 ‘같음’ 만큼이나 ‘다름’을 존중하는 것일지 모른다. 마지막 동구의 ‘Like a Virgin’ 무대에서 아버지가 뒤에서 옅은 웃음을 띄우며 동구를 바라봤다면, 오히려 그 결말이 더 억지스러웠을 것 같다.
3. 어머니,
가족.
영화 줄거리의 두 축은 동구의
가족과 씨름이다. 그래서 씨름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전에, 예쁜 아이 동구의 가족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기에 서술이 길어진다. 인간이 스스로 가지는 자존감은 10대 이전의 성장과정에서
거의 대부분 형성된다고 한다(어디서 주워들었다). 주로 어머니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러니까 자신의 존재를 파생시켜 준 사람과의 유대를 통해서 존재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항상 궁금했다. 동구는 어떻게 저렇게 예쁘게 컸을까. 어떻게 저렇게 씩씩하고 발랄할 수가 있을까.
이상아는 동구 어머니 역에
제격이었다. 그는 이 영화의 촬영 이후 인터뷰에서, 왕년의 스타였다가 조연으로 추락한 자기자신에 대한 자괴감을 털어놓은 적이 있지만 도리어 이상아가 느끼는 그런 감정이
연기에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동구 어머니 ‘수정’은 그런 사람이니까. 같이 본 친구는 이상아 얼굴을 클로즈업 할 때마다 자신도 ‘울컥’하더라고 그랬다.
왜 어머니는 이해하는데, 아버지는 그렇지 못할까. 우리가 다큐멘터리, ‘그것이 알고싶다’ 등등에서 보는 거의 모든 현실에서 가족들은 그렇다. 어머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렌스젠더인 자녀를 지원하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 게이, 트렌스젠더 등 성적 소수자에 대해 남성보다는 여성의 포용성이 더 크다는 수치를 본
적이 있다. 여성 또한 소수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도 여성이라서 그런 걸까.
답은 모르겠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혹시 동구가 딸이라서 그런 건
아닐까. 동구와 동구 어머니의 대화는 딸과 엄마의 대화이다. 내가 알기로 아들들은 어머니와 그런 식의 관계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물론 딸이라고 모두 그런 대화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일반적으로 그렇다. 그래서 어머니는 이해할 수 있었던 걸까.
4. 씨름부.
씨름부 애들이 나오는 장면은
정말 재밌다. 까르르 넘어갈 정도로. 겨드랑이가 민감한 애는 어쩌다 씨름을
하게 되었을까. 성적 흥분을 느끼면 쇼트트랙 자세를 취하는 애는 정말 영화내내 한마디도 안 하는데, 신기하게도 뭔가 계속 연기를 하고 있다.
마지막 결승전, 동구가 이길까, 이언이 이길까. 결말을 예측할 수가 없어서 정말
흥미롭게 보았다. 난 솔직히 이언이 이겼으면 했다. 씨름선수로서 이언의
개인적인 고민도 굉장히 심각해보였기 때문이다. 이언은 고3이지만, 동구는 아직 고1이니까, 내년에 우승해도 된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뭐 동구가 이겼다. 그리고 동구는 성전환 수술을 했다.
씨름부가 신선했던 이유는 모두
동구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갈등이 있지만(특히 이언과), 그들은 동구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다. 그것은 동구가 워낙 예쁘고 누구나
좋아할 아이이기 때문일까. 한창 마초성에 길들여져서 과도한 남성성에 취하는 그 또래 남자아이들과 달리 어쩌다가
씨름부는 동구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그 자신들이 뚱뚱한 일종의 소수자라서 그랬나. 나는 이 부분이 이 영화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동구의 절박함과 희망이 누군가에게 이해되고 사랑받는 그 순간. 그래서 그들은 모두 동구의
공연에 가지 않았나.
모두가
5. 소수자
‘지금까지 계속 스스로가 사회적 소수자라서 동구를 이해한 걸까’의 물음. 못된 인간은 절대로 자신과 다른 부류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최대한 너그러운 표정으로
말하는 ‘이해해’ 의 말은 ‘상관하지 않겠다’ 의 다른 표현이다. ‘너를 설득하려 하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배려이다. 계급을 뛰어넘는, 성적 취향을 뛰어넘는 이해와 사랑이 가능할까. 남성 페미니스트는 정말 존재 할 수
있을까. 부르주아 맑시스트는 허식이 아닐까. 이성애자인 게이
인권운동가는 진정일까. 나는 내가 ‘이해한다, 인정한다’고 말하는 소수적 존재들을 정말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항상 궁금하다. 자신에게 주어진 단위를 넘어서 다른 단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와 상대방의 존재가 가지는 근본적인
괴리를 어떻게 극복할까. 여기까지가 내 인식의 한계이다. 그래서 나는 정말 궁금하다.
나는 <왕의 남자>를 보고 난 주변사람들의 반응에 놀랐다. 성별, 가치관, 나이에 따라 반응이 너무 판이하게
달라서. 물론 <천하장사 마돈나>는 <왕의 남자>보다 훨씬 더 발랄하지만 더
심각하다. 그리고 건드리는 문제의식도 훨씬 더 깊숙하다. 관객이 얼마나 들지 궁금하다.
내가 영화 보는 내내 옆에 앉은 커플 관객은 ‘쟤 왜 저래? 미쳤어?’를 연발했다. 나는 추천하고 싶지만 불편해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이해한다’.



